- 2016/03/28 1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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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2/09 1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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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사건을 취재하면서 또 한 번 느낀 것은, 우리 기업들이 저성과자 해고의 도입을 요구하지만 그 전제가 되는 '공정한 평가 시스템'은 제대로 갖추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시장조사팀에 발령난 한 직원은 지난해 10월에 육아휴직에서 복직했다. 그리고 한 달이 조금 넘어 11월 말에 저성과자로 분류됐다. 정부 지침에 따르면, 저성과자 지정과 그에 따른 인사 조치는 최소 2년이 넘는 기간 동안 객관적인 평가를 거쳐 이뤄져야 한다. 이제 막 육아휴직에 복직한 직원은 전년도 평가 실적 자체가 없는데도 이런 일을 당했다. 또 다른 직원은 지난해 상반기 업적평가와 역량평가에서 모두 B등급을 받았다. A~D등급 중 중간이다. 업적평가는 양적 평가이고 역량평가는 상관인 팀장의 주관적 평가다. 이에 대해 회사 측은 해당 직원이 평가 등급은 보통이지만, 종합적으로 볼 때 해당 업무에는 부적격으로 판단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여기서 바로 문제가 발생한다. 정부 지침과 판례에 따르면 객관적 평가 근거 없이 단순히 '종합적으로 볼 때 부적격'이라며 인사 조치를 하는 것은 인사권 남용에 해당된다. 대기업에서도 평가 시스템이 이 정도 수준이라면 중소, 중견기업은 이보다 나을 리 없어 보인다.
- 2016/01/24 1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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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1/18 2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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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작 일주일 만에 두 사람의 죽음은 완전히 잊혀진 듯했다. 기사도 나오지 않고 기자실에서도 누구하나 이 사건을 거론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유서가 없던 탓이 컸다. 죽음의 사회적 맥락을 짚을 수 있는 단서가 말이다. 나는 그제서야 취재에 나섰다. 1월 4일이었다. 유족의 연락처는 어디에서도 받을 수 없었다. 시청에선 연락처를 줄리 만무했다. 이미 장례가 다 끝난 뒤라 빈소를 찾아갈 수도 없었다. 숨진 6급 공무원 최 모 씨의 딸이 온라인 커뮤니티인 '오늘의 유머'에 남겼다고 알려진 몇 개의 글만이 단서였다.
기대는 안 했지만 며칠 뒤 이 씨의 동생에게서 전화가 왔다. 묵직한 음성에 경상도 사투리가 묻어났다. 오전 10시쯤이었다. 시청에서 나오는 각종 보도자료를 단신으로 처리하느라 한창 바쁠 때였다. 하지만 나는 바로 자리에서 튀어나갔다. 중요한 전화를 할 때는 기자실에서 할 수 없다. 계단으로 가는 중간 통로가 나의 단골 장소다.
<작성 기사>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56&aid=0010273164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15&oid=056&aid=0010272837
- 2015/12/20 2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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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에서도, 그러니까 신중함과는 가장 거리가 먼 영역에서마저 나는 내 방식을 고수했던 거 같다. 얼굴에 어둠이 짙게 깔려 있던 누군가를 만난 적이 있다. 누구나 상처라는 게 있는 법이지만 조금 더 도드라진 상처를 가진 사람이라고 해야 할까. 때론 그 상처를 보듬는 행위가 내 운명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아주 짧은 얼마 동안이었지만. 나는 얼마 안 가 두려움에 휩싸이고 말았다. 내가 떠안으려 했던 그 상처가 영원한 내 인생의 덫으로 작용하진 않을까, 그 덫을 기꺼이 후회없이 받아들일 수 있을까, 결국 불행하진 않을까? 나는 "습관처럼 비이성적인 것 앞에서 이성적이 되려 했고, 단순한 것에서 복잡함을 보려 했다." "전혀 그럴 필요가 없는 상황에서도 지성에 의존하곤 했다."<나는 공산주의자와 결혼했다, 필립로스>
소설 <울분>의 주인공 메스너는 논리와 이성으로 무장한, '버드런트 러셀'의 제자를 자처하지만 사랑에선 그렇지 못했다. 그는 과거 한 차례 목숨을 끊으려 했던 한 여자를 사랑하게 된다. 눈망울에 온통 눈물뿐인 여자 올리비아를. 올리비아의 손목에 남아 있는 흉터, 그 자해의 흔적은 닥쳐올 불행을 선명하게 암시하고 있었다. 하지만 메스너는 "그런 아이를 사랑하게 되는 (자신의) 어리석음을 사랑하게 되었다." 메스너는 올리비아에게 편지를 쓴다. "나는 너하고 가까이 있는 것 말고는 원하는 게 없기 때문이야. 네 얼굴을 사랑해. 네 아름다운 몸 때문에 미칠 거 같아."
하지만 사랑은 언제나 옳은 것일까? 사랑이란 감정은 모든 다른 가치에 우선하는 것일까? 올리비아를 사랑하게 된 아들에게 어머니는 말한다.
"고통을 겪는 사람이 너한테 자기가 원하는 거, 하지만 너는 줄 수 없는 걸 간청하고 또 간청할 때 외면할 수 있겠어? ... 너한테는 양심도 있기 때문이야. 물론 너한테 양심이 있다는 게 자랑스럽지만, 양심은 네 적이 될 수도 있어. ... 다른 사람의 약한 곳은 강한 곳과 똑같이 너를 파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약한 사람들이라고 해를 주지 못하는 건 아니야. 그 사람들의 약점이 바로 그 사람들의 힘이 될 수도 있어. 그렇게 불안정한 사람은 너한테 위험해. 마키. 덫이야." "너는 네 감정보다 큰 사람이 되어야 해. 너한테 이런 요구를 하는 건 내가 아니야. 인생이 요구하는 거야. 안 그러면 너는 네 감정에 쓸려가버릴 거야. ... 감정은 무시무시한 속임수를 쓸 수 있거든. 너도 네 감정을 처리하겠다고 약속해라."
메스너는 어머니에게 올리비아와 헤어지겠다고 약속했지만 어머니가 자신의 시야에서 사라지자마자 마음을 바꾼다. 올리비아에 대한 열망은 더 뜨거워진다. 망설임 없이, 마치 그 방법 외에는 다른 대책이 없는 것처럼. 그리고 어찌보면 무척 평범하고 우연적인 그의 선택은 "끔찍하고 불가해한 경로를 거쳐 생각지도 못했던 엄청난 결과를 초래"했다. 메스너는 몇 단계의 사건을 거쳐 퇴학을 당했고 그 바람에 전쟁에 끌려갔으며 눈을 떠보니 다리 한 쪽이 절단돼 있었다. 메스너는 그렇게 죽었다.
그렇다고 메스너가 그 짧은 인생에서 해왔던 선택들을 잘못된 것이었다고 할 수 있을까?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우리에게 진정한 의미에서 선택이란 행위는 없었다고. 우리는 그저 그것이 비극으로 끝나든, 희극으로 끝나든 타고난 운명을 살아낸 것 뿐이라고. 사람들은 말한다. 매 순간 얼마나 지혜롭게 판단하고 선택하느냐에 따라 인생이 달라진다고 말한다. 마치 인생의 책임은 전적으로 우리의 선택에 달려있는 것마냥, 인생은 우리 의지에 따라 이렇게 갈 수도, 저렇게 갈 수도 있는 것마냥. 실상은 다르다. 우리의 인생을 저 위에서, 이를 테면 신의 영역에서 바라본다면 우리는 사실 저마다에게 운명지어진 길을 따라 걷고 있을 뿐이다.
감정적인 사람은 언제나 감정적으로 판단하고, 이성적인 사람은 언제나 이성적으로 판단한다. 양심에 민감한 사람은 항상 양심에 얽매여 사소한 부정에도 눈 감지 못하고, 출세욕이 강한 사람은 다른 모든 것을 희생해가며 출세를 쫓는다. 싸울 때 살아있음을 느끼는 사람은 피투성이가 되도록 싸우고, 되레 싸우면서 안도감을 느낀다. 싸우고 싶어서 싸우는 게 아니다. 싸워야만 살아갈 수 있기 때문에 싸우는 것이다.
메스너는 분명 자신의 인생을 사랑했다. 좋은 인생을 꾸려가려고 무진 애를 썼다. 그는 이성과 논리로 무장하고 인생을 철저히 자신의 계획 속에서 진행시키려 했다. 하지만 그는 결정적인 국면에선 결국 메스너답게 행동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좇까, 씨발"로 상징되는 울분을 터트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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