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두 달 사이에 벌어진 일들 어제와 오늘

오랜만에 블로그에 글을 쓴다, 라는 말로 시작하기에는 시작이 너무 밋밋하다. 다시 블로그에 글을 쓴다는 것이 스마트폰으로 '카톡'을 날리듯이 아무 때나 할 수 일인 것처럼 가벼운 일은 아닌데 말이다. 내게 블로그는 허투로 아무 얘기나 늘어놓는 공간이 아니었다. 적어도 썼다 지웠다를 수 십 번은 반복 할 정도로 공을 들였고 무언가 단단한 글을 써내려 했었다. 이제 다시 시작해야겠다. 블로그는 기록이다. 기록이 없으면 그 시간만큼은 내 기억의 사생아로 남을 지도 모를 일이다.

두 달이 넘는 공백 기간 동안 많은 일들이 있었다. 수습기자 생활을 마쳤고 새롭게 수습피디 생활을 시작했다. 어제는 씨네큐브에서 영화를 봤고 오늘은 두 달 만에 학교 근처 커피숍에서 책을 봤다. 일상의 회복이다. 수습기자 생활에서는 일상이라는 게 박탈된다. 일상은 곧 익숙한 것의 반복인데 수습기자에게 익숙한 일이란 없기 때문이다. 폐기물처리장이 불에 활활 타는 모습을 보는 것도, 새벽 5시에 구로경찰서에서 아침을 맞는 것도, 교통사고 현장에서 핏자국을 보는 것도, 모두 여태까지 살면서 겪어보지 못한 일들인 것이다. 수습기자에게 일상이 있다면 반복되는 보고와 사수의 갈굼 정도가 있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게는 사표를 꺼내들게 하는 커다란 위기는 그동안 없었다. 안타깝게도 이러한 사실이 내 추억을 밋밋하게 만든다. 분명 기자를 하려는 사람들의 마음 한 구석에는 어떤 변태적인 요소가 있는 것이 분명하다. 표면적으로는 마음씨 좋은 사수를 바라면서도 내심 '나를 한 번 제대로 조져줬으면' 하는 마음을 갖고 있는 것이다. 조짐을 당하고자 하는 욕구 말이다. 나도 비록 사수 되는 선배의 고함소리를 몇 차례 들어야했지만, 마음이 붕괴되는 수준의 것은 아니었던 셈이다.

내게 스트레스로 다가왔던 것은 선배의 고함이 아니라 선배의 평가였다. 고함은 시끄럽다. 그러나 그것은 잠깐 듣기 싫을 뿐이다. 반대로 평가는 조용하다. 그러나 그것은 두렵다. 조용하기 때문이다. 평가는 결론이다. 하루 이틀 쌓인 평가는 돌이킬 수 없는 편견이 돼 머릿속에 박힌 뒤 유통기한을 모른채 보도국 어딘가를 떠돌아다닐 게다.

내가 과연 기자로서 적합한 자질을 갖췄는가에 대한 의문이 들 때도 괴로웠다. 기자의 자질을 100% 갖춘 이가 있을 리는 없다. 있다면 더 이상 인간이 아니라고 볼 수밖에. 그러나 적어도 기자란 직업은 기자에 걸맞은 존재의 바탕은 가지고 있어야 수월한 일이다. 후천적인 학습과는 무관한, 존재의 기자적 바탕이라고 해야 할까. 이 바탕을 이루는 세세한 요소들은 다 열거하기는 어렵지만, 다른 수습기자들을 겪어 보면 그 바탕이 보이는 군상들을 찾을 수 있다. 기자가 되기 전까지만 해도 자질의 90은 학습되는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현장에서 부딪쳐보면 학습하는 부분은 부수적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수습기자, 첫 주의 기록 어제와 오늘

잠깐 짬을 내 쓰는 요즘의 기록.

하루에 한 시간 정도를 잔다. 우낀 건, 이런 말도 안 되는 근로조건에 조금씩 내 몸이 적응해가고 있다는 점이다.

'저 특유의 걸음걸이.' 기자에게 특유의 걸음걸이가 있는 걸까. 경찰서를 통과하는 데 의경이 누구냐고 묻지 않는다. 그러면서 옆에 서 있는 후임에게 속삭인다. '저 특유의 걸음걸이.'

말도 안 되는 현상은 또 있다. 기자실에서 자는 게 꽤나 아늑하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이게 하리꼬미구나, 싶다.

KBS는 그래도 다른 데보다 괜찮은 회사인 것 같다. 선배들이 적어도 밉거나 하진 않다. 전에 있던 회사에서는 잠깐이나마 미울 때가 있었는데.

방송기자의 한계를 많이 본다. 집회를 나가도 고작 한다는 게 어디서 싸움 안 벌어지나 감시하는 게 전부다.

기자실에서 놋북을 투닥거리며 기사를 쓰는 신문기자 동기들을 보면 그게 얼마나 멋있어 보이는지 모른다. 우리가 쓰는 단신은 고작해야 서너 줄인데. 난 진짜 신문기자가...(그만하자)

전과 다른 나를 많이 발견하게 된다. 전에는 경찰서 문 앞에 서기도 싫었다. 형사들과 얘기하는 건 더 싫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렇지가 않다. 그런대로 할 만하다. 때론 재밌다 싶을 때도 있다. 사실 무수한 타인과의 만남이야말로 내가 기자노동에서 가장 내 본연의 자질과 부딪치는 부분이라고 봤는데, 이 고민은 조금 덜게 됐다.

그러나 여전히 '물 먹는 것'에 대한 공포는 나를 비롯한 기자들 전부의 마음을 잠식하고 있다. 밥을 먹는 동안에도 지금 뭔가 벌어지고 있으면 어쩌지, 하는 걱정이 생긴다. 실제로 동기 두 명은 타사에 물을 먹고 나서, 선배에게 바로 연락이 왔다. "물 먹었다면서요? 알긴 알죠?" 친구는 자려다가 다시 경찰서로 뛰쳐 나와야 했다.

그런데 우낀 건, 나도 물을 먹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는 거다. 같이 필요한 정보는 공유하면서도 진짜 중요한 건 감춰 놓는다.


PD개인의 양심과 제작의 자율성 살며 생각하며

오늘은 다큐국이었다. 아침부터 담당 CP가 와서 대뜸 하는 말씀이, '이승만 특집 어떻게 생각하는지 한 명씩 말해봐' 라는 것이었다. 어려운 문제다. 다음 대선을 앞두고 정치적인 의도로 기획된 작품이라고 까기 시각하면 사실 문제는 간단해진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제작PD가 '나는 양심에 따라 이 작품을 만들었다'고 고백했다는 점이다. 제작 PD의 양심을 믿는 것, 이것이 그토록 강조되던 제작의 자율성이라는 것 아닌가. 그렇다면 이승만 특집 역시 확인도 불가능한 정치적 의도를 운운하며 매도하는 게 적절한가.

그러나 역시 이건 아니다, 싶다. 아무리 제작PD 개인의 양심을 신뢰해야 한다고 해도 어떻게 이 특집이 기획됐는가를 추적해 들어가면 문제가 간단치가 않다. 담당 CP의 지적처럼 이승만 특집은 지난 백선엽 특집과 마찬가지로 '뜬금없다'. 백선엽 다큐는 누구나 알다시피 중앙일보가 제기한 아젠다를 그냥 받아 안은 것에 불과하다. 우리의 아젠다가 아니었다는 얘기다. 따지고 보면 이는 참으로 자존심 상하는 일이다. 이승만 특집 역시 그런 측면이 있다는 게 담당 CP의 지적이었다. 우리가 진짜로 이승만 특집을 아젠다로 제시한다면, 최소한 한국의 대통령들이란 기획으로 시리즈물을 기획하든지, 뭔가 큰 틀의 아젠다 속에서 이승만 특집이 다뤄졌어야 했다. 그냥 띡 하고 이승만을 재조명하자고 하니까 뭔가 오더를 받은 아젠다가 아닌가 하는 인상을 주는 것이다.

PD개인의 자율성은 아젠다를 독자적으로 제시하는 더 큰 틀의 자율성 속에서만 의미가 있을 수 있다.


[혹성탈출] 단상 책과 영화

영화 <혹성탈출>을 봤다. 역시 할리우드라는 생각이 들었다. 할리우드 영화에도 교훈은 있다. 그러나 그 교훈은 어디까지나 관객을 불편하게 하지 않는, 딱 그런 수준의 것이다. 이를 테면, 유인원들이 인간에 반기를 들고 일어서지만 그것은 단순한 '폭동'으로 그려질 뿐 '혁명'으로 그려지지는 않는다는 얘기다. 유인원들은 악독한 인간 악당들을 때리기는 하지만 '죽이지는' 않는다. 그래서 관객은 불편하지 않다.

역시 '볼거리'보다는 '생각할 거리'가 중요하다. 며칠 전에 북촌방향을 봤다. 내가 잘 몰라서 그럴 수도 있지만 북촌방향의 카메라 워크는 어색하고 촌스럽기 이를 데 없다.(의도된 거라고 할지라도 어쨌든) 그러나 보고 나면 찝찝한 기분을 지울 수 없다. 혹성탈출의 명쾌함이란 찾아볼 수 없다. 그러한 찝찝함이 어디서 오는가는 같이 영화를 본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다 보면 조금씩 그 출처를 발견할 수 있다. 나란 인간과는 전혀 다른 종자의 인간처럼 보이던 유준상의 모습에서 나와 닮은 점, 또는 내 욕망의 일부를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아무튼 이렇게 저렇게 생각하다 보면 '아, 영화는 재밌구나' 싶은데, 주로 볼거리로 들이대는 영화들은 그렇지가 못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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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큐 3일'의 기획안을 제출하라는 데 적당한 소재가 떠오르지 않는다. 수요일까지 내야 하는데 마음이 무겁다. 뭐하지...? 아이템 좀 있으면...(굽신굽신)


[학교란 무엇인가] 단상 책과 영화

EBS다큐 <학교란 무엇인가>를 봤다. 전체 10부작인데 5부까지 봤다. 다큐멘터리를 보고 나면 항상 드는 생각이 내게 '무엇이 남았나' 하는 의문이다. 주제라면 주제이고 통찰이라면 통찰이 손에 꼭 잡히지가 않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내가 영상을 보는 것보다 활자를 읽는 것을 더 생산적이라고 느꼈던 이유이다. 그러나 <학교> 시리즈를 보면서 다큐멘터리는 바로 거기에 가치가 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달았다. 무엇이 남나, 하는 의문을 남기는 것, 알려주기보다 느끼게 하는 것이 다큐멘터리의 기본 속성이라는 것을 말이다.

물론, 다큐멘터리라고 해도 누가 만드느냐에 따라서 그 성격은 조금씩 달라진다. 기자가 만드는 다큐멘터리는 활자적 속성을 가지고 있어서 시청자에게 전달할 메시지를 정해 놓고 그것을 향해 죽 달려가는 방식이다. 반면, 피디의 그것에는 뚜렷한 메시지 또는 답이란 게 없다. 답이 없음은 우리에게 의문을 남겨 주고 여기서부터 얼마나 생각을 하고 문제에 파고드느냐는 보는 사람의 몫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다큐멘터리는 보는 사람의 노력 정도에 따라 그 가치가 달라진다고 하겠다.

다큐멘터리는 따분하다. 무겁기 때문이다. 요즘 사람들은 무거운 것을 싫어한다. 어떻게 하면 재미있는 다큐멘터리가 가능한가? 잊지 말아야 할 질문이다. 그런 점에서 핵심은 결국 '이야기'다. 사람들이 드라마에 열광하는 것은 거기에 이야기가 있기 때문이다. 재밌는 다큐멘터리의 해답도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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