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달이 넘는 공백 기간 동안 많은 일들이 있었다. 수습기자 생활을 마쳤고 새롭게 수습피디 생활을 시작했다. 어제는 씨네큐브에서 영화를 봤고 오늘은 두 달 만에 학교 근처 커피숍에서 책을 봤다. 일상의 회복이다. 수습기자 생활에서는 일상이라는 게 박탈된다. 일상은 곧 익숙한 것의 반복인데 수습기자에게 익숙한 일이란 없기 때문이다. 폐기물처리장이 불에 활활 타는 모습을 보는 것도, 새벽 5시에 구로경찰서에서 아침을 맞는 것도, 교통사고 현장에서 핏자국을 보는 것도, 모두 여태까지 살면서 겪어보지 못한 일들인 것이다. 수습기자에게 일상이 있다면 반복되는 보고와 사수의 갈굼 정도가 있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게는 사표를 꺼내들게 하는 커다란 위기는 그동안 없었다. 안타깝게도 이러한 사실이 내 추억을 밋밋하게 만든다. 분명 기자를 하려는 사람들의 마음 한 구석에는 어떤 변태적인 요소가 있는 것이 분명하다. 표면적으로는 마음씨 좋은 사수를 바라면서도 내심 '나를 한 번 제대로 조져줬으면' 하는 마음을 갖고 있는 것이다. 조짐을 당하고자 하는 욕구 말이다. 나도 비록 사수 되는 선배의 고함소리를 몇 차례 들어야했지만, 마음이 붕괴되는 수준의 것은 아니었던 셈이다.
내게 스트레스로 다가왔던 것은 선배의 고함이 아니라 선배의 평가였다. 고함은 시끄럽다. 그러나 그것은 잠깐 듣기 싫을 뿐이다. 반대로 평가는 조용하다. 그러나 그것은 두렵다. 조용하기 때문이다. 평가는 결론이다. 하루 이틀 쌓인 평가는 돌이킬 수 없는 편견이 돼 머릿속에 박힌 뒤 유통기한을 모른채 보도국 어딘가를 떠돌아다닐 게다.
내가 과연 기자로서 적합한 자질을 갖췄는가에 대한 의문이 들 때도 괴로웠다. 기자의 자질을 100% 갖춘 이가 있을 리는 없다. 있다면 더 이상 인간이 아니라고 볼 수밖에. 그러나 적어도 기자란 직업은 기자에 걸맞은 존재의 바탕은 가지고 있어야 수월한 일이다. 후천적인 학습과는 무관한, 존재의 기자적 바탕이라고 해야 할까. 이 바탕을 이루는 세세한 요소들은 다 열거하기는 어렵지만, 다른 수습기자들을 겪어 보면 그 바탕이 보이는 군상들을 찾을 수 있다. 기자가 되기 전까지만 해도 자질의 90은 학습되는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현장에서 부딪쳐보면 학습하는 부분은 부수적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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