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주 한 잔에 담긴 자유의 크기란 살며 생각하며

나는 참 풍요롭게 산다. 오늘 점심은 63빌딩 지하 1층에 있는 샤브샤브 집에서 먹었다. 함께 파업하는 선배가 마련한 자리였다. 그리고는 아메리카노를 마셨다. 저녁은 일본석 선술집에서 먹었다. 나가사키 짬뽕에 볶음밥을 시켰다. 아사히 생맥주도 곁들였다. 밖에는 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고, 우리는 테라스에서 비오는 정취를 느끼며 맥주를 들이켰다. 집으로 오는 길에는 책을 한 권 사고 근처 카페에 들어가 30페이지 정도를 읽었다.

이 모든 것이 내게는 너무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이다. 나는 이러한 가운데 '자유'를 느낀다. 아니, 자유롭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대단한 특혜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문득 문득 깨달을 때가 있다. 맥주를 들이키는 내 시야 속에 폐지를 이고 걸어가는 한 노인이 들어온다. 풍요의 거리 한 가운데에 가난한 노인이 서 있다. 그와 나의 거리는 불과 손을 뻗으면 닿을 거리지만 우리가 처해 있는 세계는 완전히 다르다. 그는 내가 먹고 마시며 버린 이 세계의 쓰레기를 주워 살아간다. 버리는 자와 줍는 자가 한 공간에 머물러 있다.

그에게는 맥주 한 잔도 사치일 수 있다. 그에게는 책 한 권이 사치일 수 있다. 63빌딩은 본 적도 가본 적도 없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에게는 이 모든 것이 자연스럽다. 이런 상황을 마주하며 내가 느끼는 불편함이란 무엇일까. 불편함은 금방 사라진다. 나는 다시 나만의 세계로 돌아와 이 모든 것을 익숙하게 받아들인다.

이것을 죄책감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저 불쌍하다고 느끼는 것일까. 불쌍하다는 것은 그저 하나의 '감상'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감상에 그치는 것이 옳지 않다면 옳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그렇다고 내가 하루에 커피 두 잔 마셔야 할 것을 한 잔을 줄일 것은 아니지 않은가. 설사 그렇게 한다고 해도 그게 무슨 의미인가. 그 사람에게는 그 사람만의 인생 역정이 있지 않겠는가. 그 사람은 스스로 자신의 인생을 지금의 모습으로 만들어온 게 아니겠나. 미안함을 느낀다고 해서 어쩌자는 것인가.

나는 문득 이럴 때 '잘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렇게 시덥지 않게 하루를 보낼 게 아니라 제대로 살자고 마음을 다진다. 그러나 제대로 산다는 것은 어떻게 산다는 것을 말하는 걸까. 결국, 나만 생각하며 살지 말아야겠다는 다짐이 아닐까 싶다. 맥주 한 잔에 담기 자유의 크기를 나만 누려서는 안 된다는 문제의식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리라.


즐거운 투쟁? 언론노동자 파업의 순진함에 대하여 살며 생각하며

파업이 50일을 넘겼지만 우리네 삶이 그 숫자의 무게만큼 고달픈 것은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아직도 즐거운 투쟁을 이야기 하고 있다. 그러나 투쟁이 즐거울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어쩌면 우리 투쟁의 순진함을 방증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절박하다면 즐거울 수가 없기 때문이다.

곰곰히 생각해 보면, 우리가 과연 이기기 위해서 싸우는가 하는 의문이 들 때도 있다. 아니, 공공연하게 이것은 이기기 위한 싸움이 아니라고 말하는 선배들도 있다. 면피용 싸움, 또는 노조원을 대상으로 한 정치교육의 장으로서 이 파업이 기능하고 있다는 것이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과연 나는 이 싸움에 절박한가. 그렇지 않다. 무엇보다 싸움에서 져도 잃을 것이 없다. 이것은 내가 가진 무언가를 빼았기는 싸움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이 싸움을 어떻게 끝장낼 것인지 고민하지 않는다. 매일의 집회 일정을 따라다니기 바쁘다. 이건 마치 기껏 링에 올라가 허공을 향해 주먹질 하는 것만큼이나 힘 빠지는 일이다.

애초에 ‘공정방송’이란 대의를 위해 내가 가진 모든 것을 걸고 싸우겠다는 말 자체가 순진한 것인지도 모른다. 파업 승리라는 목표는 모두의 것이기에 누구의 것도 아니다. 공정방송쟁취라는 대의는 우리의 즉자적 감정을 건드리기에는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 우리는 대의를 이야기하지만 대의를 위한 실천에는 은연중에 한계를 두고 있다.

나는, 우리 안에, 또는 최소한 내 안에 이 싸움을 반드시 이기겠다는 절박감이 없다고, 더 나아가 어쩌면 있을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다른 노동자들처럼 생존을 위해 싸우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공장노동자가 불의에 저항하는 뜻으로 분신을 하는 경우는 봤지만, 언론노동자가 같은 이우로 분신을 하는 경우는 들어본 적이 없다.

그렇다면 이 싸움은 왜 하나. 무엇을 남겨야 하나. 나는 생각한다. 조직논리에, 위계적 서열문화에, 선배의 일방적인 지시·명령에 맞설 수 있는 저항의 기억을 남기는 것이 파업의 가장 현실적 목표라고. 특히, 나 자신처럼 싸움꾼 DNA가 없는 사람들에게는 파업 학교를 통해 배우고 스스로 변해야 할 부분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중요한 것은, 파업 기간이 아니라 오히려 파업 이후가 될 테다. 파업 이전의 나와 파업 이후의 나가 한 명의 기자로서 아무런 차이가 없다면, 그것은 패배한 싸움이다.
언젠가 파업은 끝날 것이고 나는 현장으로 돌아갈 것이다. 어느 때인가 일상성에 짓눌려 정치적 무뇌의 상태로 살아갈 즈음 이 글을 다시 읽어봐야겠다. 


KBS 막내 기자가 선배들께 드리는 편지 살며 생각하며

"냉소적인 눈빛이 아닌, 따뜻한 편지 한 통 보내주세요."

  오전 11시 반, KBS 신관 로비. 우리는 오늘도 외칩니다. “공정방송 하자는데, 막장징계 웬말이냐!” 오늘따라 동료·선배들의 목소리에 결의가 묻어납니다. 어느 때보다 비장한 표정들입니다. 그럴 겁니다.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지난 주말, 우리의 최경영 선배가 해고됐기 때문입니다. 

  ‘해고.’ 사실 실감이 잘 나지 않는 단업니다. 기자 경력이 채 1년도 되지 않은, 저 같은 신참 기자에게 해고란 비현실 그 자쳅니다. 해고 소식이 전해진 날, 최 선배에게 문자를 보냈습니다. 선배는 금방 답장을 보내왔습니다. “고맙다. 나도 너희들의 눈망울에서 많은 것을 배우고 있다.” 선배는 그날 밤 숱한 격려 문자를 받았을 겁니다. 그렇게 파업이 시작된 지 50여일 만에 첫 번째 해고자가 나왔습니다.

  피켓 시위를 할 때마다 저는 선배들의 ‘눈빛’을 유심히 들여다봅니다. ‘선배들은 우리 앞을 지나가며 어떤 생각을 할까.’ 저희를 훓고 지나가는 선배들의 눈빛은 많은 것들을 얘기하고 있었습니다. ‘신입들이 한참 배울 땐데 파업이나 하고 있으니.’ ‘도대체 언제까지 파업을 하려고 저렇게 고집을 부리는 건지, 쯧쯧.’ 선배들의 눈빛에서 냉소가 느껴졌습니다. 물론, 냉소가 전부는 아닙니다. 어떤 선배는 이런 문자를 보내왔습니다. ‘부끄러워서 얼굴을 들지 못하겠더라, 밥 든든히 먹고 끝까지 싸워라.’ 그렇습니다. 저희를 바라보는 선배들의 심정은, 저희가 선배를 바라보는 심정만큼이나 복잡하고 미묘할 겁니다. 

  사실상 입사 첫 해에 파업을 맞이하면서 이런 생각을 해봤습니다. KBS라는 커다란 조직 안에서, 지금, 우리 38기가 마땅히 해야 할 ‘역할’은 무엇일까. 모든 조직은 해마다 새로운 구성원을 맞습니다. 이유가 뭘까요. 저는 ‘타성’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여기서, 38기의 존재이유도 그렇습니다. 

  저희는 선배들의 우려처럼 이른바 ‘시위꾼 선배’들의 선동에 휩쓸려서 여기에 나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저희는 선배들을 불편하게 만드는 한 마리 ‘등에’가 되기 위해 나왔습니다. 마구간의 말이 잠들려 하면, 등을 콕콕 찔러 일으켜 세우는 등에 말입니다. 저희는 지금보다 더 높은 수준의 공정성과 정치적 독립을 원합니다. 만약, 저희가 KBS저널리즘에 대해 아무런 문제의식도 갖지 않고 조직문화에 물들어버린다면, 그것은 신참의 존재이유를 배반하는 것입니다. 저희는 조직에 무조건 순응하기보다 조직을 불편하게 만드는 신참이 되고자 합니다. 그러한 불편함이 KBS저널리즘을 더 발전시키는 데 기여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물론, 선배들의 걱정도 잘 알고 있습니다. ‘일을 배워야 한다’는 것이지요. 맞습니다. 기자가 되려면 취재현장에서 ‘기자질의 기술’을 배워야 합니다. 그러나 기자의 자격은 기술을 익히는 것만으로 주어지지 않습니다. 좋은 기자의 또 다른 조건은 아마도 ‘기자정신’에 있을 겁니다. 저희는 파업현장에서도 많은 것들을 배우고 있습니다. 권력을 비판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또 그 어려움을 어떻게 버텨내고 이겨낼 것인지를 말입니다. 선배·동기들과의 토론에서, 저녁마다 이어지는 촛불집회에서 말입니다. 저희는 파업현장에서도 하루하루 성장하고 있습니다. 

  선배, 파업과 관련해 제 개인적인 얘기를 해보겠습니다. 저는 이른바 하리꼬미(밤샘취재)를 하면서 ‘FTA집회’를 집중 취재했었습니다. 그때의 경험은 제가 파업에 참여하는 데 중요한 계기가 됐습니다. 집회 현장에서 KBS는 찬밥신세를 넘어 ‘나쁜 언론’ 신세를 면치 못했습니다.인터뷰는 거부당했고 카메라 기자들은 카메라를 꺼야 했습니다. 

  ‘있는 그대로’ 공정하게 보도하겠다는 저의 의도는 거기서 중요치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제가 어떤 기자인지 궁금해 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저 기자가 신뢰할 만한 언론사의 기자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때 깨달았습니다. ‘공정방송은 기자 개인이 발버둥친다고 해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입니다. 기자는 자신이 쓴 기사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하는 동시에, 자신이 속한 조직에 대해서도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을 말입니다. 저는 이번 파업이 KBS에 대한 국민들의 신뢰를 회복하는 데 조금이나마 보탬이 될 거라 믿습니다. 

  파업이 50일이 넘어갑니다. 어머니는 아침마다 물어 보십니다. “오늘은 몇 시에 나가니?” 파업은 제 일상을 불확실성으로 채워 놓았습니다. 매일 같이 규칙적으로 출근하고 밥 먹고 퇴근하던 저였는데 말입니다. 요즘도 저는 ‘보도정보 프로그램’을 켜서 선배들이 작성한 기사를 확인하곤 합니다. 그럴 때면 기분이 이상해집니다. 선배들과 나란히 앉아 일하던 게 불과 몇 주 전인데 말입니다. 생각해 보니, 선배와 전화통화를 한 지도 꽤 오래 됐군요. 선배, 저는 앞에서 얘기한 것처럼 이런 생각들을 하며 살고 있습니다. 선배는 어떻게 지내시나요? 제게도 편지 한 통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38기 막내 기자 올림.

* <미디어오늘> 기고 글


<정치의 몰락> 그러나 여전히 정치는 힘이 세다 책과 영화

박성민 정치컨설턴트와 프레시안 강양구 기자의 대담집 <정치의 몰락>을 읽었다. 대담집이라고는 하지만, 강 기자는 주로 질문을 던지고 박성민 컨설턴트가 답하는 식이다. 즉, 한국사회의 정치 몰락에 대한 박 씨의 분석과 조언이 책의 뼈대를 이룬다. 책은 제목 답게 정치 전반을 다룬다. 시대정신에서부터 갖가지 정치현상, 그리고 지도자와 정당을 다룬다. 특히, 지도자와 정당에 관한 부분은 새겨둘 만하다.

정치인을 '뽑는' 데만 열중할 게 아니라 '기르는' 데 더 신경을 써야 한다.

저자는 말한다. 정치가의 충원 시스템이 고장난 정도가 아니라 아예 없다고 말이다. 최소한 군인은 20세부터 체계적인 교육과 훈련을 받는다. 그러나 정치인은 정당, 대학, 연구소 어느 곳에서도 제대로 길러지지 않는다. 국회의원은 당선되고 나서야 정치를 배우나. 국회는 '인턴 헌법기관'이라는 말이 나오는 이유다. 

얼마 전 한겨레21에서 한국의 정당은 '법조당'이라는 기획 기사를 쓴 적이 있다. 정확한 지적이다. 정치인 충원 시스템이 부재하다보니 교수나 변호사, 의사 등 전문가 집단이 주로 정치권에 들어오는 것이다. 저자는 말한다. 이건 정치의 위기를 넘어 '국가의 위기'라고 말이다. 전문가들은 우리 사회의 5%에 불과하다. 이들 5%로가 국민 전체를 대변하고 있으니 대의 정치가 제대로 실현될 리 없다. 

정치부 기자로서 민주당 공천 과정을 취재하면서 느낀 건 이런 거다. 공천은 곧 '영입'이라는 것. 공천심사위원도 밖에서 영입하고, 공천 대상자도 밖에서 영입한다. 영입은 어떻게 이뤄지나. 알음알음 추천을 받아 당 대표의 결단으로 이뤄진다. 당 내부에서 경험과 실력을 쌓은, 훈련된 정치가는 존재하지도 않고 있더라도 관심을 받지 못 한다. 총선 한 두 달 전에 입당해서 공천을 받는다는 것이 상식적으로 말이 되는가. 당의 이념이나 지향, 존재이유를 그들 낙하산 공천자들이 얼마나 체화하고 있을까. 

미국이나 유럽에서는정당이 차세대 정치인을 발굴하고 교육하고 훈련하는 일을 한다. 버락 오바마나 데이비드 캐머런이 40대에 대통령을 하는 것은 그만큼 일찌감치 정치에 입문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나이는 40대일 망정 '정치연령'은 60대 이상이다. 

저자는 20대가 선출직에 도전할 수 있도록 공천 방식을 바꿔야 한다고 주장한다. 20대를 보좌관이나 비서관으로 훈련시킨 뒤 30대가 되면 지방의원이나 자치단체장이 될 수 있도록 하고 이렇게 훈련받은 이들이 국회의원에도 도전해야 한다는 얘기다. 또한, 여성할당제처럼 20대나 30대를 위한 할당제를 운영하는 것도 한 방안이다. 저자의 지적처럼, 선진과 후진의 차이는 사람에 의존하느냐, 제도에 의존하느냐에 있다. 우리 정당들도 고도의 훈련된 정치가를 양성하는 제도를 하루빨리 만들어야 한다.

국회의원의 권한이 강화되는 것이 시민의 권력이 강화되는 길

여의도에는 '권력 총량의 법칙'이라는 게 있다. 선출권력, 즉 국회의원의 권한이 약해지만 그만큼 비선출권력인 검찰, 사법부, 관료의 권한이 강해진다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상황을 자초하는 것은 정치인이다. 권력 총량의 법칙을 증명하는 가장 좋은 사례는 아마도 FTA일 것이다. 나라의 운명을 결정짓는 통상 조약을 맺으면서 우리 대의기관은 조약의 내용도 제때 파악할 수 없었다. 통상관료들이 여러 이유를 들어 공개를 거부하거나 미뤘기 때문이다. 국회의 검증기능도 관료들의 전문성에 비해 크게 부족했다. 

저자는 말한다. 우리나라 대형 로펌이 전직 국회의원이 아닌 관료를 거액의 연봉을 주고 데려가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고. 그렇다. 로펌은 알고 있는 것이다. 관료들이야말로 한국사회를 움직이고 있는 집단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저자는 국회의원의 보좌관이나 비서관을 두 배로 늘리자고 주장한다. 물론, 여기에는 추가비용이 든다. 그러나 그만큼 국회가 행정부를 더 철저히 감시하고 국민세금이 엉뚱한 데 쓰이지 않도록 감시한다면, 이는 보좌관의 인건비가 늘어나는 것보다 더 큰 이익을 가져다 줄 것이다. 

그렇다면 정당의 길은?

저자가 '정당의 위기'라는 현실진단에 대해 동의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정당 무용론을 펼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정당이 기능이 회복되고 강화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위기의 원인은 크게 두 가지다. 첫째는, 정당의 '이익집단화'가 그것이다. 정당이 '자리'를 나눠먹는 사람들의 모임, 즉 동지가 아닌 동업집단이 됐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익집단화는 이른바 '권력의 사유화'와 맞닿아 있다. 당을 대표하는 이념을 가진 사람인가를 기준으로 후보자를 선출하기보다 당선가능성만을 기준으로 후보자를 선출하고, 여기에 줄을 대 나중에 한 자리 차지하려는 사람들로 정당이 변질됐다는 것이다. 둘째는, 책임정치의 실종이다. 선거 때마다 당을 해체하고 해쳐모여를 반복하면서 책임정치가 실종된 것이다.

물론, 이러한 거시저인 분석도 타당하다. 그러나 내가 볼 때, 정당의 위기를 가장 실감할 수 있는 곳은 아마도 당사일 것이다. 민주당을 출입하면서 당사를 여러번 가게 된다. 그때마다 느끼는 것은, 당사에 사람이 없다는 것. 물론, 당직자는 있다. 문제는 일반 시민이 또는 당원이 그곳에 없다는 것이다. 새누리든 민주든 통진이든 당사는 한국사회는커녕 지역사회와도 철저히 단절돼 있다. 최장집 교수가 여러 차례 지적했던, 사회에 착근하지 못하고 둥둥 떠다니는 정당을 당사의 풍경은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저자도 말미에서 지적하지만, 정당이 제 기능을 하기 위해서는 '생활 공동체'로서 사회에 뿌리내려야 한다. "정당도 (교회처럼) 시민을 상대로 법률 상담에서부터 문화 학교까지 재미, 정보, 네트워크를 제공하는 생활 공동체를 모색해야 한다. 그래야 그 안에서 풀뿌리 구청장, 국회의원도 나올 수 있다. 생활 속으로 파고 들어야 혁명, 즉 비가역적인 변화가 가능하다."

짧은 경력이지만 정치부 기자를 하면서 한국 정치의 민낮을 마주하게 된다. 지도자, 지도자를 뽑는 시스템, 지도자를 키우는 정당, 이 중에서 어느 것 하나 제대로 갖춰진 게 없는 게 한국정치의 현실이다. 그러나 누누이 강조하지만 정치는 여전히 힘이 세다. 또한, 우리 운명을 우리 손으로 결정지을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 또한 정치다. 정치의 몰락은 우리 모두의 몰락인 것이다.


장하준의 재벌개혁론 : 경영권 보장과 책임의 맞교환 책과 영화

장하준 교수의 신작 <무엇을 할 것인가>를 읽었다. 주주자본주의를 비판하면서 성장 요인으로 정부의 '산업정책'과 '정책금융'을 주장하고 있는데, 이는 전작 <그들이 말하지 않은 23가지>, <나쁜 사마리아인들>에서도 꾸준히 얘기해 온 것들이다. 다만 신작에서는 한국사회라는 구체적인 대상을 염두해 두고 위와 같은 논의를 진행하고 있다. 또한, 이른바 경제민주화론자들로 불리는 지식인들(홍종학 김상조 유종일)을 강하게 비판하고 있는 점이 눈에 띈다. 이들 경제민주화론자들은 민주통합당의 재벌 개혁 공약을 설계한 사람들이기도 하다. 책의 전체 내용에서 '재벌 개혁'과 관련된 부분만 발췌해서 요약했다.

주주자본주의 비판 : 누구를 위한 기업투명성과 책임경영인가? 

우리나라 주요 10개 상장사의 경우, 2003년부터 200년 3년간 올린 순이이익이 65조인데, 그중 43%인 28조를 배당금과 자사주 매입 등을 통해 주주들에게 쏟아부었다. 만약 주주 분배액 중 3분의 1만 잘라 협력 업체에 하청 단가 인상에 쓰더라도 나라 전체가 감격할 거다. 이 돈을 제약이나 우주항공 정밀기계 등 신산업에 투자한다면 삼성도 10~20년 뒤 세계적인 제약업체를 가질 수 있을 것.

삼성전자나 현대차가 좋은 실적을 거두는 것은 꾸준히 기술 개발 투자를 해온 덕분이다. 이들은 재벌의 그룹구조를 버리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도 투자율이 유지되는 것이다. 그룹 구조가 주주 자본주의의 압력에 대한 일종의 보호막 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다. 반대로 하이닉스는 론스타 손에 들어가는 바람에 삼성처럼 공격적인 투자를 못하면서 지금까지 점차 퇴보해왔다. 오늘날 기업투자와 경제성장을 방해하면서 분배를 외치는 최대의 분배주의자들은 바로 주식 투자자들이고 금융 자본이다. 신자유주의 금융 자본이야말로 최대의 분배주의자들이다. 

경제민주화론자들의 주장은 재벌 개혁의 목표가 '기업투명성' 과 '책임경영' 확립이라는 데 있다는 것이다. 문제는 누구를 위한 책임, 누구를 위한 투명성이냐는 데 있다. 종업원고 국민에게는 무책임하고 경영진은 주식 투자자들과 결탁하는 이런 회사가 경제민주화를 주장하는 분들이 말하는 좋은 기업인가? 문제는 주주들의 이익과 종업원의 이익이 함께 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쌍용차의 무더기 정리해고는 재벌이 저지른 비극이 아니라 재벌 해체로 인해 불거진 비극이다. 중국 상하이 차가 기술만 다 빼먹은 뒤 먹튀 해버리고 경영진이 생존을 위해 인력구조조정을 감행한 것이다.  

재벌 규제와 재벌의 소유권 상속 문제에 대해

민주통합당과 통합진보당은 411총선에서 재벌 개혁을 주요 공약으로 제시한 바 있다. 출자총액제한제도 부활과 관련해 통합진보당은 순자산의 25% 이상 출자를 출자총액제한의 기준으로 삼자고 주장한다. 이렇게 되면, 한화그룹과 현대중공업은 당장 출총제 대상이 되고 재벌그룹은 개별 기업으로 해체 된다. 또한, 통진당은 지주회사 규제와 관련해, 지주회사는 자회사의 지분을 현행 40%에서 상향해 80% 이상 소유해야 주장하고 있다. 이들의 주장대로라면 우리 재벌은 대우처럼 개별 기업으로 해체되는 수순을 밟아야 한다. 

이들이 추진하는 재벌 규제 강화는 결과적으로 사모펀드와 투자은행 같은 월스트리트 금융자본에게 잔칫상을 차려 주는 게 된다. 진정한 경제 민주화를 위해서는 '재벌규제'가 아니라 '주주자본주의'를 규제해야 하고, 그 일환으로 1998년 이후 폐지된 여러 가지 경영권 방어 장치를 부활시켜 그런 부작용을 없애는 편이 낫다. 정부는 그 대가로 생산 기지의 해외이전 제한, 설비 및 R&D 투자 확대, 미래형 신산업 투자, 그리고 복지국가 건설 및 부자 증세 협조 등이 있다.

재벌들은 상속에서 특혜를 누려도 되는가

기업집단을 총괄하는 총수 혹은 회장이라는 자리는 법률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삼성이 이건희 회장 지시로 그룹 경영 차원에서 잘못된 일을 저질렀다고 해도 상성그룹이나 이건희 회장에게 법률적 책임을 물을 수가 없다. 1998년 IMF 사태와 함께 망해버린 삼성자동차가 대표적인 예다. 이건희 회장은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았다. 삼성그룹이라는 기업집단과 계열사들의 사업을 실질적으로 감독하고 기획하는 회장 직속 기관인 기획조정실은 법률적 실체가 아니라서 아무런 법적 책임을 물을 수  없었다. 한국의 재벌 총수들은 권리는 있고 책임은 없는 황제 경영을 하고 있는데, 차라리 이런 황제 경영을 합법화 시켜주는 대신 책임도 확실하게 지우는 게 필요하다.

해결책은 공익재단을 활용하는 것이다. 삼성과 현대차 그룹의 소유권을 공익 재단으로 이전해 해당 재벌을 준 국민 기업 내지는 준 공기업으로 만들자는 것이다. 스웨덴의 발렌베리 그룹이 이런 형태다. 또한 기업집단법을 제정해서 상법 회사법 상으로 유령이나 다름 없는 삼성그룹 같은 기업집단에 대한 조항을 만드는 것이다.

재벌가문의 재산권 상속은 우리나라 거대 기업집단의 운명과 직결되는 문제이기 때문에 잘못하면 한국 경제가 흔들릴 수 있다. 경영능력이 검증되지 않은 재벌 2세, 3세가 거대한 기업집단의 경영권을 인수했을 때의 위험도 고려해야 한다. 기업집단법을 만들어재벌의 재벌의 경영권은 안정 시켜 주자, 대신에 그에 상응하는 법적 책임도 엄정하게 짊어지게 하자, 신산업 투자와 노동권 보장, 부자 증세 등도 반드시 받아내도록 하자는 것이다.  

비판
- 재벌 가문의 경영권을 보장해준다면, 능력이 검증되지 않은 재벌 2세 3세의 경영권 인수를 어떻게 할 것인가?
- 삼성으로 하여금 기업집단법을 통해 경영권과 사회적 책임을 맞교환 하도록 강제하는 힘은 어디에서 비롯하며 그것을 어떻게 만들어낼 것인가?
- 재벌의 경영권을 보장해준다고 해서 재벌이 신산업에 투자한다는 보장이 있는가?
- 기업의 미래를 위해서는 주주자본주의가 위험하다고 했는데, 주주는 엄연히 법률적으로 기업의 주인이 아닌가? 주주자본주의를 극복하기 위한 대안으로 이해관계자 자본주의, 즉 노동자 하청업체 소비자가 참여하는 경영 방식에 대한 장하준의 생각은 어떠한가? 
- 장하준은 지식경제론 탈산업론을 비판하면서 정부의 산업정책을 강조하는데, 지나치게 원론적인 주장 아닌가? 좋은 산업정책의 조건은 무엇인가?


1 2 3 4 5 6 7 8 9 10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