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론>> 서평 : 2장 생각과 토론의 자유를 중심으로
밀의 주요 주장과 그 근거들
밀은 <<자유론>>의 2장에서, 남과 다른 의견을 가질 자유와 그것을 표현할 수 있는 자유가 인간 정신의 진보에 필수적인 것임을 주장하고 있다. 밀은 그러한 자유를 부정하는 것은 같은 세대뿐만 아니라 미래의 인류에게까지 "강도짓"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얘기하고 있다.
밀이 주장하는 바의 첫 번째 근거는 "권력을 동원해서 억누르려는 의견이 사실은 옳은 것"일 수 있다는 것이다. 밀은 우리 각자가 아는 것과 믿는 것이 절대적인 진리일 수 없음을 반복해서 강조하고 있다. 사실 그것들은 자기가 속한 집단(정당, 교회, 계급)에서의 경험을 통해 익숙해진 것에 불과하다. 그리고 그 집단이란 "하찮은 사건"으로 인해 바뀔 수 있는, 우연적인 것이다. 또한 지난 역사에서 보듯이, 한 때 진리라고 여겨졌던 것들이 현대로 오면서 수없이 부정되었고 오늘의 진리 역시 미래에 그러할 것이다.
밀이 진리라는 것에 대해 '상대주의적'인 시각을 보여주는 것은, 근본적으로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라는 그의 전제에서 비롯된다. 인간의 지적 능력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완전한 지식이란 것도 불가능하다. 완전성에 대한 믿음은 토론의 여지를 없앨 뿐이다. 그러나 밀이 그저 인간 능력에 대해 그저 회의적인 것만은 아니다. 밀은 인간의 진정한 특징이자 능력으로 "자신의 잘못을 시정할 수 있는 능력"을 강조하고 있다. 잘못의 시정을 위해서 필요한 것이 과거의 경험에 대한 토론이다. "다른 사람의 생각과 자신의 생각을 비교하고 대조하면서 틀린 것은 고치고 부족한 것은 보충하는 일"을 습관화하면서 우리는 "더 높은 진리"에 다가가고, "최선을 길"을 발견할 수 있다.
밀과 마키아벨리, 그리고 토마스 모어
밀은 근대의 정치사상가로서, 마키아벨리로부터 시작된 진리에 대한 상대주의적 이해를 공유하고 있다. 진리상대성에 대한 밀의 생각은 '모든 의견이 나름의 진리를 가지고 있다'는 그의 진술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밀은 인식론의 차원에서 뿐만 아니라 존재론의 차원에서도 불변의 진리관념을 가지고 있지 않은 듯하다. 그는 빈번하게 "절반의 진리"라는 표현을 쓰는데, 이는 그 자체로 유일무이한 것으로서 진리의 본래적 의미와는 모순되는 것으로, 사실상 '잠정적으로 확실한 것' 정도의 의미를 띤다고 볼 수 있다. 플라톤과 같은 고대의 정치 사상가들에게는 마땅히 추구할 것이었던 진리관념이, 밀에게는 오히려 자유로운 생각과 토론을 억압하는 아집으로 여겨진다. 절대성은 근대의 다원주의 사회에서 더 이상 미덕이 되지 못하는 것이다. 이것은 이상적인 정치공동체의 미덕으로 '동질성'이 강조되었던 토마스 모어의 <<유토피아>>와도 구분되는 점이다. 책 속의 유토피아가 모어 자신의 유토피아인지에 관해서는 논란이 있지만, 금욕적인 기독교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개별성'이 억제될 수밖에 없다. 반면, 밀의 견해에 따르면 이견이 없는 사회는 활력을 상실한 사회다. 오히려 인간정신에 대한 억압 체제가 해체되고 이견이 최대한 존중될 때만이 역사의 발전이 가능하다. 밀은 그 실례로 종교개혁이나 18세기 독일의 지적 부흥을 들고 있다.
밀이 지혜를 얻기 위한 '유일한' 방법으로 다른 사람과의 토론을 상정한 것은 특기할 만하다. 이는 지혜의 수단으로 플라톤이 '상기의 노고'를, 마키아벨리가 '역사의 관찰'을 얘기했던 것과 구분된다. 소크라테스 역시 토론의 중요성을 강조하기는 했지만, 그의 산파술은 기본적으로 다른 사람의 믿음을 깨뜨려 무지를 일깨워주는 것이다. 반면, 밀의 토론은 현자가 우둔한 사람을 깨우쳐준다기보다는 동등한 수준의 토론자들이 서로의 견해를 교환하는 과정에서 스스로 부족한 점을 깨치는 것이다. 또한 토론의 중요성이 커지는 것은 지식의 대중화라는 사회현상과 연관된 것으로 추론해 볼 수 있다. 토론은 기본적으로 다수가 참여하는 것이고 누구나 그 곁에서 내용을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그것은 고도의 철학적 훈련이나 오래된 역사책이 없이도 가능한 것이다. 밀에게 지식은 철학자나 정치학자만의 것이 아니라 "보통 사람"의 것이기도 하다. 밀은 각자가 자기 삶의 "진정한 길잡이"라며, 모든 사람이 독립적 인간으로 스스로 사고해야 함을 피력했다.
반박과 재반박
이상 논의된 밀의 주장에 대한 반박으로, 억압된 의견이 진리일지 모른다고 하더라도 사회적 유용성을 위해서 특정 견해를 억누르거나 특별히 보호할 수 있다는 주장이 제기될 수 있다. 밀은 여기에 대해 "어떤 생각이 담고 있는 진리는 그 생각이 가진 효용의 일부"라고 반박한다. 또한 그 견해의 유용성에 대해서는 사람마다 의견이 다르므로 진리 여부를 판단하는 것만큼이나 치열한 토론이 있어야 한다.
두 번째로 밀이 생각의 자유를 주장하는 근거는 기존의 생각(통념)이 옳은 것이라 할지라도, 거기에 대한 자유토론이 없을 경우 그것은 "살아있는 진리가 아니라 죽은 독단"이 된다는 것이다. 밀에 따르면, 사람들은 많은 것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그것들의 '근거'에 대해서는 잘 모르거나 무관심한 경우가 많다. 이런 사람들은 누군가가 주장하는 바를 아무런 생각 없이 그저 믿어버린다. 밀은 적어도 무엇은 안다고 하려면, 적어도 "상식적 수준에서 제기되는 비판에 대해서 제대로 반박할 수 있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 자신과 입장이 다른 사람의 견해에 귀를 기울이고, 편견 없이 정확하게 이해해야 한다.
밀에게는 진리 여부를 떠나 '이견의 존재'는 그 자체로 긍정적인 것이다. 자유 토론은 사람들을 '믿음의 관성'에서 깨어나게 해 진리에 생명력을 불어 넣어준다. 사람들은 이견에 대해 생각해보면서 자기가 믿는 것의 의미를 다시금 되새겨본다. 자유토론이 없다면 "그 의미를 둘러싼 껍데기는 남을지 몰라도 정말 중요한 본질"은 잃어버리게 된다. 밀은 그리스도교적 믿음을 예로 들며, 사람들이 종교에 경의를 표하기는 하지만 실제 그들의 삶을 교리에 따라 규율하지는 않는다고 지적한다.
<자유론>의 한계
밀이 생각과 토론의 자유를 주장한 것은 그것이 인류의 발전을 위해 필수적인 것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독립적으로 생각하고 판단하는 인간을 위함이었다. 독립적 인간은 "무엇이 왜 문제인지" 늘 생각하려고 노력하는데, 그 방법이 '변증법'이다. 밀은 변증법의 "부정적 비판"을 통해 얻은 지식이야말로 진정한 지식이라고 했다.
오늘날을 보면 생각과 토론의 자유는 시민의 기본권으로 보호되고 있다(국가보안법이 여전히 남아있지만). 누구도 특정 사상을 강요하지 못하며 모든 사안이 토론의 주제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자유가 주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개개인이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는 '독립적 인간'이 되었는가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다. 오히려 현대인은 부정적 비판의 능력을 점점 상실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미디어는 우리의 생각과 판단을 대신해주고 있으며, 위계적인 노동조직에서 개인이 독립적으로 판단할 영역은 극히 좁다. 게다가 생존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우리 삶은 노동시장의 요구를 따르는 데 급급해 부정적 비판이니 하는 것은 사치품이 돼 버렸다. 다양성은 극히 취약해지고 학점과 취업이 전부가 되다시피 한 대학사회의 풍경은 그 예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을 고려하면 밀이 궁극적으로 희망했던 인간의 정신적 독립은 단지 생각과 토론의 자유가 주어졌다고 달성되는 것이 아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오늘날 개인의 자유로운 사고를 억압하는 것은 밀의 시대에서처럼 국가의 공권력만이 아니라 점점 커지고 있는 시장의 힘이라고 해야 하겠다. 시장은 이익창출에 유용한 것을 계산해 내는 도구적 이성만을 부추기기 때문에 도덕이나 정치와 연관된 부정적 비판은 그 역할을 점차 상실하고 있다. 이런 현상이 심화되면 밀의 이상과는 달리, 우리 사회는 독립적 인간이 아니라 경제동물로 채워질지도 모른다. 진정 자유로운 인간의 세계를 만들기 위해서는 형식적인 생각과 토론의 자유를 넘어서는 새로운 상상력이 필요하다.












덧글
zingoon 2011/05/17 07:37 # 답글
님의글을 읽고 [밀의 자유론]을 읽어 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nevis 2011/05/17 12:11 #
책세상에서 나온 <자유론>이 읽기 좋고 해설도 잘 나와 있습니다.